“나는 진보” 41%→27%로 줄었지만읽음

3. 이념지형

#종합금융회사 임원 곽모씨(49·부산 범일동)는 79학번이다. 대학 2학년 시절 ‘서울의 봄’(1980년)을 거쳤고, 사회 초년병이던 1987년 6월항쟁 때는 ‘넥타이 부대’로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진보’였지만, 두 딸의 아버지가 된 지금은 자신을 ‘중도’라고 말한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는 기권했는데, 이번엔 한나라당 후보를 찍기로 했다. 아직은 경제성장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관심이 많다. 그는 자신을 “안정적 생활을 하고픈 현실주의자”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세금 강화를 전제로 복지 정책이 최우선시돼야 한다고 믿는 쪽이다.

[2007 대선, 이것이 변수다] “나는 진보” 41%→27%로 줄었지만

#대기업 과장 김모씨(41·경기 고양시 행신동)는 5년 전 대선에서 주저없이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386세대의 전형인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중 2 큰딸 등 아이들 교육비가 만만찮은 요즘이다. 후보를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한나라당을 지지하려고 한다. “밑에서 먹고 사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시장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그런 부분을 (후보가) 고민해줘야 되지 않나 싶다”는 이유에서다.

[2007 대선, 이것이 변수다] “나는 진보” 41%→27%로 줄었지만

2007년 ‘보수(保守)’는 하나의 유행어가 되고 있다. 성장 담론이 선거판을 지배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전례없이 결집한 보수 지식인과 시민단체 등 ‘재야 보수’의 출현도 이전에 보지 못한 양상이다. 2002년을 달군 ‘진보(進步)’는 존망을 걱정하는 왜소한 처지가 됐다. 과연 한국인의 이념지형은 오른쪽으로 이동했는가.

-보수화냐, 중도화냐-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가 지난 1월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와 함께 실시한 ‘2007년 유권자 성향조사’ 결과는 시사적이다. 2002년과 비교하면 이념지형 변화가 뚜렷하다. 2002년 조사에서 스스로를 ‘진보’라고 답한 경우가 41.1%, ‘중도’ 32.3%, ‘보수’ 26.6%이던 것이 5년 뒤엔 진보 27.1%, 중도 36.8%, 보수 30.1% 비율로 변했다. 확연히 진보가 줄고 중도와 보수가 늘어난 구도다.

이 결과 해석을 두고 ‘보수화론’과 ‘중도화론’이 엇갈린다. 보수화론은 보수 의제가 뿌리를 내리면서 전반적으로 국민의식이 ‘한 클릭’ 오른쪽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고, 중도화론은 “보수 강화는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진보층이 줄면서 중도층이 두꺼워졌을 뿐”(김형준 명지대 교수)이라는 해석이다.

후자 쪽 해석이 맞다면 이들의 이념성향은 중도이면서도 상당부분 진보성을 내재한 것이어서 정치적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차정미 여의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전체적으로 실용적 스탠스가 강해진 것 같다. 견고한 진보와 보수는 각 20%대밖에 안된다는 해석이 맞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보수화’의 명확한 근거는 다른 조사에서도 잘 찾기가 어렵다. 지난해 말 동아시아연구원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2002년 조사와 비교할 때 ‘줄어든 진보층(6.3%포인트)’과 ‘늘어난 중도층(6.5%포인트)’ 비율이 거의 정확히 일치했다.

[2007 대선, 이것이 변수다] “나는 진보” 41%→27%로 줄었지만

그러나 구체적 사안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이념정체성’을 살펴보면 오히려 진보·보수가 모두 늘어나는 분화 양상이 감지된다. 특히 사회·경제적 사안에서 이런 경향이 강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념 정체성과 실질적 이념 정체성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2002년부터 거의 매년 실시된 한국갤럽의 ‘국민의식조사’ 추이가 대표적이다. 경제문제 해법으로 ‘분배’를 고른 경우가 29%(2002년)에서 2007년 36%로 늘었고, ‘성장’을 택한 경우도 46%에서 59%로 증가했다. 반면 2002년 25%였던 ‘잘 모르겠다’는 유보적 답변은 5%로 급격히 줄었다.

김헌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소장은 “양극화 문제 때문에 경제를 중심으로 한 이념지형은 강화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문제는 정치의식-

이념적 분화가 뚜렷해지는 데도 보수화 흐름이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 실마리는 지난 1월 발표된 여의도연구소의 ‘유권자성향’ 조사 결과에서 찾을 수 있다. ‘증세를 통한 복지’ ‘부에 대한 세금 중과’ ‘재벌 개혁’ 등 경제적 사안에선 진보적 응답이 강한 반면, ‘대북 지원’ ‘북한 인권’ ‘국가보안법 폐지’ 등 정치적 사안에선 보수적 태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갤럽 국민의식조사에서도 5년 전 71.4%이던 ‘무조건적 대북 지원 반대’가 83.8%로 뛰었다.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경찰의 무력 사용’에 동의하는 비율은 41.2%에서 62.5%로 큰 폭 상승했다. 갤럽이 15개 항목에 대해 0(중도)을 기준으로 ±50점을 배점하는 방식으로 측정한 이념지수 결과를 보면 이 같은 흐름은 더욱 뚜렷하다.

[2007 대선, 이것이 변수다] “나는 진보” 41%→27%로 줄었지만
[2007 대선, 이것이 변수다] “나는 진보” 41%→27%로 줄었지만

정치의식 +(우)19.99점, 경제의식 -(좌)4.46점, 사회의식 -(좌)1.6점으로, 종합적으로는 중도보수에 해당하는 4.6점의 지표가 산출됐다. 경제·사회적으로는 진보적임에도 대북 지원, 파업, 사회질서 유지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한 보수성이 커지면서 스스로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서강대 겸임교수)는 “진보진영이 정권을 담당하는 것을 보면서 전반적으로 진보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진보 프리미엄’이 없어지면서 사회가 오른쪽으로 이동했다”고 풀이했다. 경제문제에 대한 참여정부의 실정이 출발점이지만, 그 실패가 ‘진보정권’이기 때문이라는 정치적 실망감으로 옮겨지며 표출되고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지금의 한나라당에 대한 높은 지지는 정치의식 보수화에 기댄 측면이 크고 그만큼 견고하지 못하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실제 여의도연구소 조사에서 한나라당 지지층의 45.5%, 특히 새로 유입된 층의 60.1%가 지지정당을 바꿀 수 있다고 응답했다.

2002년의 ‘진보 바람’에서도 비슷한 구조는 감지된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당시 한 월간지 기고문에서 진보바람을 ‘진보적 중도주의’로 분석한 바 있다. 당시 노후보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에 가까워 진보로 볼 수 없음에도 사회정책은 사민주의를 지향, 보수와의 대결에 성공했다는 분석이다. 그런 관점에서 최근 흐름은 정치의식의 보수화에 편승한 ‘우파지향성 중도주의’의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

-보수에도 재야가 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지난 3·1절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보수집회에 대선 예비후보 중 유일하게 참석했다. 사전 행사에 10여분간 잠시 얼굴을 내민 정도지만 작지 않은 부담이었다. 보수세력에 대한 구애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 참석은 지난해 시장 임기를 마칠 무렵 한 보수집회에 불참했다가 당한 낭패와 무관치 않다. 얼마 뒤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가 일간지 광고를 통해 “한나라당은 ‘좌파종식 투쟁 선봉장’을 뽑으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표면적으로는 지도부 경선에 출마한 이재오 의원의 전력을 문제삼은 것이지만, 겨냥점은 이의원과 밀접한 관계인 이전시장이었다. 이전시장 측 관계자는 “지금은 오해를 풀었지만, 사실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치권 밖 보수세력이 집단적·공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2002년만 해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2004년 가을 뉴라이트(신보수)를 기치로 내건 ‘자유주의연대’ 출범을 시작으로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보수 지식인·시민단체, 보수 인터넷 미디어는 우리 사회의 이념풍경을 바꿔 놓았다.

이들 ‘재야 보수’의 존재는 보수 정치권의 진지(陣地)이자 울타리가 되고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미선양 사건으로 거센 ‘반미·자주’ 바람이 불자, 노무현 후보도 가지 않은 촛불시위 현장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찾던 장면은 흘러간 추억이 됐다. 뉴라이트전국연합만 회원이 11만명에 이를 정도다.

중앙대 이상돈 교수는 “보수 재야세력은 노무현 정권 이후 생성된 것 같다. 김대중 정권 때만 해도 한나라당이 다시 집권할 줄 알았기에 그런 (결집에 대한) 인식이 좀 덜 돼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 간 보수 지식인들의 활동은 전방위에 걸쳐있다.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 포럼’이 펴낸 ‘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등은 보수진영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뒤집어 보는 시도였다. 이들의 지도자론은 박정희·이승만의 ‘조국근대화론’에 착종하고 있고, 회고적 보수 향수를 자극하는 촉매로 작용했다. 지난해 3월에는 보수 지식인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저지하자는 것은 ‘제2의 쇄국’으로 가겠다는 것”이라며 연대를 모색했다. 올 1월 보수인사 100명이 참석한 국가비상대책협의회 주최 신년토론회에선 대선을 앞둔 ‘우파대연합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중도보수 성향인 ‘한국선진화포럼’의 경우 2005년 11월 1차 월례토론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4차례의 토론회를 열었다. 선진화경제, 국민의식, 한국사회의 진로, 노사관계, 부동산정책, 교육문제 등 각종 논쟁적 이슈에 대해 보수진영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2005년 1월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가 한 권의 책을 들고와 당 상임운영위에 보고했다. ‘우파국가’(The Right Nation)였다. 제목에서 읽히듯 미국 보수정당 공화당의 집권전략이 담긴 책이다.

전략의 핵심은 ▲자생적 (보수) 시민단체의 조직 ▲싱크탱크를 통한 정책개발 ▲청년시절 좌파였던 신보수주의자와의 제휴·협력 ▲종교적 우파와의 동맹 ▲보수성향 미디어 매체를 통한 보수주의 이념 전파 등이었다. 뉴라이트 등 보수 지식인·시민단체의 탄생, 각종 보수 인터넷 매체들의 전위대적 활동 등 이후 한국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475세대의 선택이 가른다-

2007년 이념지형의 열쇠는 5년 전 대선에서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 당시 40대, 즉 45~54세의 층이다. 5년 전과 비교해 이들의 의식변화가 가장 극적이란 점에서다.

이들은 여론조사 기관들이 ‘노마드(유목민)’로 분류하는 가변성이 큰 집단이다. 2002년 정몽준 후보를 떠받치다가, 단일화 이후 노무현 후보로 이동했고, 참여정부 들어서는 고건 전 총리에게 관심을 두다 지금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초점은 이들 세대의 ‘보수화’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2002년 ‘조건 없는 대북지원’에 대해 찬성 18%, 반대 71.4%였던 이 세대는 2007년 찬성(12.5%)·반대(83.3%)로 변했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도 2002년 55.3%에서 74.4%(2007년)로 급증했다. 특히 ‘시위에 대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경찰의 폭력사용’에 공감한 경우는 74%로 55세 이상(70.1~72.8%)에 비해 보수성이 더 짙었다.

이념지수로 보면 이들 연령층의 정치의식은 17점에서 2007년 26.6점으로 보수화됐다. 이전 세대(55세 이후)의 26.7~28.6점과 큰 차이가 없는 반면, 이후 세대(19~44세)의 11.8점~17.3점과는 현격한 차이를 나타냈다. 2002년 젊은 층의 손을 잡은 그들이 지금은 과거 세대에 동조(同調)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경우 ‘서울의 봄’을 기점으로 나뉘는 386세대와 사회·문화적 특성이 상이하다. 소위 ‘475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유신 치하에서 대학을 다녔고 통기타와 자유로 상징되는 서구 저항문화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그 결과 운동진영 내부에서도 엘리트적·지사적 낭만성이 강하다는 평을 받았다. 반면 386은 통일·반미운동의 세대이자 운동권 문화의 대중화를 이뤄낸 세대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차이는 45~54세층이 경제적 고통을 가장 체감하는 세대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애들 교육하고, 나도 각종 사회보험 많이 내지만, 노후가 걱정”(금융회사 임원 곽모씨)이라는 언급이 이를 대변한다. 자녀 교육비의 부담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인데 ‘사오정’이란 말이 나올 만큼 고용은 불안하다. 곧 다가올 노후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최근 경향신문의 ‘설 민심 여론조사’에서 40대가 ‘사교육비 등 교육문제’(51.9%)를, 50대가 ‘노후문제’(45.9%)를 각각 최우선 관심사로 꼽은 것과도 연관되는 대목이다.

차정미 여의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들 세대는) 감세니 성장이니 이런 문제에 굉장히 실용성이 강하고, 참여정부에서 경제문제가 심각하다고 보기에 성장 위주로 가야한다는 쪽”이라며 “(이들의 의식 변화는) 최근 몇년 사이 벌어진 반사적인 판단으로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정치권의 대응이 잘못됐다는 진단도 나온다. 실제 여론 흐름은 ‘남북 중심 체제 대립’에서 ‘사회·경제적 계층 대립’으로 이동하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헌태 KSOI 소장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 승리로 ‘민주화 대 반민주’의 가치 대립은 해소됐다”며 “그러나 이후 비(非)보수진영은 방향성을 상실한 채 여전히 ‘민주화’ 전선이니 ‘평화개혁’ 같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소재로 차별성을 희석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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