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소신·클린·개혁으로 버무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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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오후 이명박 서울시장이 당선 인사차 들른 오세훈 당선자와 악수하고 있다.
의정활동·정치인맥 등을 통해 본 오세훈의 정치요체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 그의 공직 경력은 국회의원 생활 4년이 전부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 후보 출선 선언 52일 만에 큰 표 차이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단숨에 정치권 ‘중심세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의 저력은 무엇인가.

그의 서울시장 당선은 정보화 사회의 중심인 매스미디어의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대중성은 TV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TV 토론프로그램의 진행과 ‘오 변호사 배 변호사’ 출연으로 얻은 그의 대중성은 정치권에서 놓칠 수 없는 매력포인트였다. 여기다가 자연공원 내 위락·숙박시설 불허 재판, 아파트 일조권 침해 사건 승소 등으로 법률전문가로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시민단체 낙선운동 금지조항에 대한 최초 헌법소원도 법조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2000년 제16대 총선을 통해 정치에 입문할 당시 오 당선자의 주가는 상한가였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두 차례나 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 입당을 요청받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한나라당을 선택했다. 오 당선자는 “아무래도 야당이 운신의 폭이 클 것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남경필 의원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1997년 미국 예일대에서 MBA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남경필 의원은 오 당선자의 처남인 송상기 고려대 교수로부터 ‘오 변호사를 도와주라’는 부탁을 받았다. 오 당선자가 예일대로 유학을 온 것이다. 오 당선자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고 유학 동기를 밝혔다. 남경필 의원은 집도 구해주고 이불도 갖다줬다. 1998년 남경필 의원은 아버지 남평우 전 의원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보궐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됐다. 남경필 의원는 2000년 “젊은 우리가 함께 한나라당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한나라당으로 발걸음을 돌린 이유가 남경필 의원과의 인연 때문이라면 정계입문에 대한 욕구를 불어넣은 것은 최열 환경재단 대표이다. 최열 대표는 “오 당선자는 정치를 할 것인지, 학계로 갈 것인지 고민했다”면서 “어차피 국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정치로 나가라”고 권했다. 오 당선자는 시민운동으로는 한계가 있고 국회의원 한 사람의 판단과 정책 추진 효율성이 대단하다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최열 대표은 환경재단의 맹지연 부장을 ‘오세훈 의원’ 비서관으로 파견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시민운동으론 한계, 정치로 나가라”

2001년 한나라당 소장파 모임인 미래연대 소속 의원들이 당 개혁을 주제로 세미나를 하고 있다.
오 당선자는 4년 내내 국회 환경노동위에서 일했다. KSDC가 실시한 16대 국회 의정활동 평가(299명)에서 조순형(법사·민주)·김성순 의원(복지·민주)에 이어 ‘오세훈 의원’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주5일제 근무와 고용허가제 찬성 등과 평택의 다이옥신 피해고발, 먹는 샘물의 수질부담금 체납 고발 등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나온 것.

이런 ‘녹색운동’은 정풍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회창 전 총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오 당선자는 “나를 이회창 계파로 부르지 말아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회창 전 총재를 향한 정풍운동의 예고였다.

오 당선자가 ‘개혁운동’을 주도할 수 있던 것은 2000년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의 모임인 미래연대를 만들면서부터다. 그 당시 권오을·정병국·원희룡·권영세·김성조·김영선·김용학·남경필·심규철·심재철·이성헌 의원 등이 오 당선자와 ‘동지적 결합’을 하면서 개혁운동의 기반을 얻게 된 것이다. 사실 그들은 ‘보수 대수술’의 최전방에 서 있었다. 이들과 거의 모두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이어오던 권위주의적 정치풍토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든 2004년에 정치권에 검은 돈이 유입되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선거법·정치자금법 개정안, 일명 ‘오세훈법’을 만든 게 최고의 성과다. 권오을 의원은 “‘오세훈법’을 설명하면서 ‘더 이상 정치인이 돈받는 세상은 없도록 하자’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그만두겠다’며 호소했다”면서 “그때의 ‘엄숙한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감동이 깨끗한 정치인, 개혁적인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오 당선자의 정치적 인맥은 그리 넓지 않았던 것 같다. 임인배 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오 당선자는 미래연대 의원 이외에는 접촉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16대 국회 개원 직후인 2000년 7월 ‘국회법 날치기’ 처리 저지를 위한 ‘동원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당내에선 “누구는 이런 짓을 하고 싶어서 하냐” “너만 잘났냐”며 ‘왕따’를 시켰다고 한다.

미래연대 의원 외엔 접촉 많지 않아

이 때문에 오 당선자는 권오을·이병석·홍준표 의원 등 고대 출신 한나라당 의원과 미래연대 소속의 소장파 의원들과 어울리는 데 그쳤다는 게 정가의 일반적인 이야기다. 이외에 임인배 의원 등 마음이 통하는 동료 의원과 가끔 골프를 치거나 술 한잔 한 게 고작이라고 한다. 간혹 두산과 현대 등 재벌 2세와 변호사 업무관계로 접촉했다. 특이한 것은 그가 외국어대에 재학하다가 고대로 편입학을 위해 다녔던 김영편입학원 김영 원장이 아직도 후원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세훈 당선자가 2004년 1월 17대 4·15총선 불출마선언을 하고 있다.
정치권 인맥이 협소하다보다 오 당선자를 찾는 옛 동지들 역시 미래연대의 후신인 수요모임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원희룡·남경필 의원 등은 꾸준히 오 당선자의 출마를 권유했다. 이외에도 박형준·김기현·권영세·김양수·김명주·김희정·박승환·이주호·안홍준·진수희·이성권·정문헌 의원도 지원사격을 했음은 물론이다.

원 의원은 “8월부터 10월까지 개혁적이고 미래재향적 ‘상품’을 내놓기 위해 설득했는데 그 당시 오 당선자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서 “그땐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서울 대일고 1년 선배인 박형준 의원(수요모임 대표)이 지난 3월 다시 총대를 맸다. 박형준 의원은 “내가 나서서 후보를 만들어 보겠다”며 적극적인 설득을 했다.

오세훈의 드라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됐다. 2002년 6·13 지방선거를 2개월여 앞둔 4월까지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측 대변인을 맡고 있던 오 당선자는 이명박 후보에게 “형님, 다음 차례는 접니다”라고 대뜸 ‘농중진담‘을 던졌다. 오 당선자는 서울시 정무부시장 자리를 꾸준히 노크했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이 시장을 만나 행정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면서 “오 당선자가 서울시장의 꿈을 꾸었고 나름대로 노력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오 당선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서울시장 공식 선거운동기간에 들어가기 직전 자신이 데리고 있던 박영준 정무팀장을 오 후보진영에 보내는 배려를 했다. 고대 동문으로 ‘이명박 사람’으로 손꼽히던 홍준표 의원의 “전여옥 의원과 같은 사람 10명만 있으면 다음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한다”고 ‘친박근혜성 발언’의 계기가 됐다.

그러나 오 당선자는 박근혜 대표와 ‘각별한 인연’을 엮을 기회가 없었다. 오 당선자가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 비서실 부실장을 맡았고 최병렬 대표 때에는 청년위원장을 맡았지만 박근혜 대표와 당직을 맡아 손발을 맞출 기회는 없었다. 국회의원 불출마선언으로 정계를 떠났기 때문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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